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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목 탐방로를 따라 가파른 나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땀이 살짝 나기 시작했다. 울창하게 우거진 숲이 시원해서 고마웠다. 처음엔 참 고마웠다. 하지만 30분쯤 올랐을 때였을까. 해가 이미 한 창 떴을 시간인 9시인데, 사방은 고요하고 어두웠다. 지나는 사람이 없으니 으스스하기도 했다. 그런 기운이 잠시 스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 단위의 등산객이 열심히 내 뒤를 쫒았다. 그리고 곧 추월했다. 나는 잠시 쉼터에 기대 앉았다. 자신만만하게 출발했지만 1시간이 거의 지나가자 땀도 많이 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앞은 아직도 어두 컴컴한 숲이어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동네 가까운 산도 아니고,오후에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여기서 지치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어제 스윙바에 다녀오느라고 잠도 제대로 못잔 상태였기 때문에 체력이 걱정이었다. 그래도 한라산 한 번 올라보자는 굳은 결심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길고 긴 나무의 터널을 지나고 빛을 보았다. 그 빛의 끝자락에는 평평한 광야가 함께 있었다. 새로운 광경이었다. 산을 오르자 평지가 나타나는 것이었다.조금 오르다 보니 왼 편에 약수터가 있었다. 역시 '등산은 약수 맛'이라는 텔레비젼을 통한 학습효과 덕에 자연스럽게 약수터로 향했다. 약수터에서 기념 사진 한 장 찍었다. 길고 길며 울창한 숲 속의 계단 등산로를 빠져나오면 거짓말처럼 약간 경사진 평지가 나타난다. 수평선의 끝에 닿아있는 구름의 아름다움을 뒤로 하여 사진을 찍었다. 마치 산자락 끝에 구름이 내려 앉아있는 듯 했다. 날씨도 좋았다. 화창한 가을 날씨는 한라산의 옷자락을 더욱 반짝반짝 빛나게 해주었다. 거의 10년 전쯤 제주를 찾았을 때 비오는 날씨 덕택에 한라산만 올라가지를 못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드디어 정상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록담에 오를 수는 없었다. 현재 어리목 탐방로는 자연 보호를 위해 정상까지의 길을 막아놓았기 때문이었다. 반대편 관음사 코스는 정상을 오를 수 있었지만, 1일의 일정으로는 무리여서 등반 목적지를 윗세오름으로 정했고, 백록담의 모습을 멀리서나마 보고 내려 올 생각이었다. 해발 1600여 미터의 윗세오름에 올랐다. 오전 11시 쯤. 약 4시간이 걸린다는 탐방로를 부지런히 따라 올라 3시간 반 정도 걸려 올랐다. 바쁘게 올라오다 보니 배가 출출해졌다. 게다가 탐방로를 오르던 중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정상에서 먹는 컵라면이 맛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윗세오름 기념 사진을 찍자마자 라면을 사러 휴게소로 향했다. 휴게소에서 파는 컵라면은 육개장 라면이었다. 한 그릇에 1,300원이었다. 라면 한 개를 주문하면 끊는 물을 부어주며 비닐 봉지를 한 개 준다. 한라산에는 쓰레기통이 없으니 먹고 남은 빈 그릇을 담아가라는 뜻이었다. 라면 한 개를 들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 곳에는 한가로운 토요일의 햇살을 즐기는 등산객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그 등산객들이 주는 모이를 먹으러 몰려드는 까마귀들도 많이 있었다.

내려오는 길은 영실 탐방로를 선택했다. 내려오는 길이가 더 짧기때문이기도 했고, 이왕이면, 어리목과 다른 모습의 한라산을 보고 싶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영실 코스를 따라 내려오는 동안 햇살의 산란을 받으며 셀카 한장었다. 찍고 보니, 흐릿한 사진 너머로 피곤한 모습이 역력한 '내'가 보였다. 영실 코스는 역시 들은 대로 경사가 심한 편이었다. 올라오는 사람들이 힘들어 보였다. 역시 어제 만난 사람들의 얘기가 없었다면 나도 여기 이 사람들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영실코스를 타고 올라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어쩌면 다리에 힘이 풀려서 집에도 못가고 그랬을 지도 몰랐다.영실코스는 가파른 등산로 뿐아니라 등산로 옆으로 천길 낭떠러지가 따라 다녔다.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정도로 무서운 절벽들은 기괴함과 아름 다움, 그리고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도록 해주었다. 병풍바위를 뒤로 하여 서둘러 등산로를 내려오면서 온 몸이 흰색이 되어버린 나무들을 보았다. 화산재의 영향이라고 본 것 같은데, 자세한 건 모르겠다. 아무튼 신사동에 있는 유명한 의상 디자이너의 의상실 전시 작품 같아 보이기도 했다.


영실 코스는 그 길이가 짧다. 그래서 처음 한라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다고 한다. 하지만 가파른 경사를 보고 내려오면서, 역시 세상엔 공짜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짧고 빠르면 그 만큼 잃는 것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추가하자면, 영실 코스는 등산로 입구와 버스 정류장까지 위와 같은 도로를 한 참 걸어가야 할 만큼 떨어져 있다. 역시, 영실 코스가 그냥 짧은게 '절대' 아니었다.

덧. 버스 정류장 까지 나무로된 길을 따라 내려 가다보면 옆에 뱀 조심이라는 팻말이 있다. 무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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